보수주의, 하나님 인정하는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 : 정치 : 기독일보


조선 숙종 때 윤두서(尹斗緖)가 그린 고지도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에도 공험진과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 만주 지역에 표기되어 있다. 즉, 이곳에 언급된 지명은 모두 조선에 속하는 지명이란 뜻이다. 이렇게 조선의 영토는 분명히 만주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상의 근거로 볼 때 위 기록의 기준점이 된 경원도호부의 위치는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이라고 볼 수 없다.


향화인의 출신 국가와,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맥락에 따라 귀화정책과 대응은 다양하지만, 전체적으 로 조선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이 주를 이루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법령집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내의원에서 인삼속미음을 올리는 규정이 실려있다. 국휼(國恤),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천릉(遷陵), 내전(內殿)의 사친상(事親喪), 국기일(國忌日) 등에 인삼속미음을 올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전 또한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백여 명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였으므로, 양반 사족이 아니면 하기 어려웠다. 일반 사건은 그 재판을 담당한 관리가 바뀐 뒤 2년 이내에 갱소할 수 있었다. 이 갱소는 중앙은 주장관(主掌官)주82에게, 지방은 관찰사에게 상소하였다. 만일 거기서도 불복이 있으면 의금부의 신문고를 쳐서 국왕에게 직소할 수 있었다. 장(杖) 이상의 범죄는 수금(囚禁)하되 신분에 따라 구속 절차에 경중이 있었다.


사실 수도 서울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나라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천이라는 거대한 하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생명수가 전달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서울 곳곳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것이 청계천을 통해서 배설됨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새 논을 다시 개간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남아 있는 농경지를 최대한 집약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모내기가 필연적이었다. 밭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간에는 모판에 모를 기르는 곳 외에는 모두 보리 등을 심어 밭농사를 짓다가 물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되면 보리 등을 수확한 뒤 밭을 논으로 바꾸어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모내기를 하면 김을 매는 데 드는 품도 절약할 수 있었다.


즉,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한 후 1439년 당시까지 47년 동안 조선은 고려의 북방 영토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고 1439년 이후에야 조선이 공험진 일대까지 통치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면서 비로소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만약 공험진이 함흥평야나 길주군 이남에 있었다면 세종대왕이 공험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명절 때마다 다리밟기, 연날리기, 연등행사, 편싸움(양쪽으로 편을 나누어 돌을 던지는 놀이, 石戰) 등 민속놀이가 펼쳐지는 장소였으며, 다리를 중심으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해학의 공간이었다. 아낙네들에게 유용한 빨래터였으며, 아이들에게는 개천 바닥이 말라있을 때는 공터로서, 물이 흐르고 있을 때는 멱감는 장소로 더할 수 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난전 중에는 보잘것없는 상인이 많았지만, 더러는 시전 상인과 맞설만한 부상도 있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수공업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 수공업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장의 일부는 아직도 관아에 예속된 임금기술자로 남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 대다수는 자유수공업자가 되어 상업자본가에게 임금기술자로 고용되거나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근대적 내용을 갖추어 갔으나, 관료제도와 중앙집권체제의 본질적 혁신을 추구하지는 못하였다. 1897년 고종이 황제를 표방하여 국호를 바꾸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여러 부문에서 근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으나, 정치적 변화는 미진하였다. 관료제도 또한 겉모습은 근대적으로 바뀌는 듯하였으나 본질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였다. 특히 황제가 전근대 군신관계를 바탕으로 한 정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근대적 중앙집권체제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영웅소설에는 「 유충렬전」, 「 소대성전」, 「 조웅전」, 「 장풍운전」 등이 있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웅소설에는 「 정수정전」, 「 김희경전」, 「 정현무전」 등이 있다. 세종 때는 이 밖에도 천문 관측을 위한 대소의 간의(簡儀), 천체관측기인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만들어졌다. 또,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 역법(曆法)도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을 참조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 칠정산외편』이 저술되었다. 태종도 22사(寺)만 사격(寺格)을 인정하고 나머지 사사(寺社)주183는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는 보(洑)가 개발되어 관개에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논농사가 한층 활발해졌으나, 자연재해 특히 가뭄이 들 때 그 피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 후 이모작을 위한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보의 수리와 신축이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의 사법 행위에서 반드시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은 지배층의 범죄와 관련된 것과 사형으로 판결이 난 것들이다.


조선의 광업은 시대에 따라 주력 광물이 달랐고, 경영형태도 차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대개 농민의 부역 노동에 의존하는 관영 광산 위주였으나, 차츰 임금노동자를 투입하여 채굴하는 사영 광산이 많아지게 되었다. 1888년에는 해산회사(海産會社)라는 어업 관련 기업이 처음 조선의 자본으로 설립되었다.

대구유달 유달 포항유달 포항유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